육 가야는 기원후 42년, 신라 유리왕 19년에 김수로의 여섯 형제들이 세운 여섯 가야국을 통칭한다. 육 가야는 바로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금관국)⋅함안 지역의 아라가야⋅고성 부근의 소가야, 경상북도 상주 지역의 고령가야(古寧伽倻)⋅고령(高靈) 지역의 대가야⋅성주 부근의 성산가야이다. 소가야 대신 경상남도 창녕 지역의 비화가야를 들기도 한다.
육촌은 박혁거세를 도와 사로국(斯盧國)을 세운 여섯 부락을 통칭한다. 사로국은 신라의 전신이며, 사로를 서벌⋅서라벌⋅서나벌이라고도 했다. 해서 육촌을 사로육촌⋅서벌육촌으로도 부른다. 곧, 알천 양산촌⋅돌산 고허촌⋅취산 진지촌⋅무산 대수촌⋅금산 가리촌⋅명활산 고야촌이다.
김수로와 박혁거세는 고주몽과 마찬가지로 "알"에서 태어났다. 알은 여기서 십중팔구"새알"즉 새의 알일 터이다. 그러고 보니 은(상) 왕조의 시조 설과 진국의 시조 대업도 알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서국의 언왕도 알에서 태어났다. 중국 동한 정현《모시전전》:"유융씨의 딸 간적이 제비가 떨구어 준 알을 받아 삼키고는 설을 낳았다.(謂鳦遺卵, 娀氏之女簡狄吞之而生契。"《사기⋅진본기》:"제비가 떨구어 준 알을 여수가 받아서 삼키고는 대업을 낳았다.(玄鳥隕卵, 女修吞之, 生子大業。)"중국 서진 장화《박물지⋅이문》권7에서 인용한《서언왕지》:"서국 군주의 한 비빈이 임신하고 알을 낳았는데 이것을 불길하게 여기고는 물가에 내버렸다. ……태어날 때 반듯하게 앙와하고 있어서 이렇게 이름하였다.(徐君宫人娠而生卵, 以爲不祥, 棄之水濱。……生時正偃, 故以爲名。) 여기서 언(偃) 자는 앙와하다, 곧 배와 가슴을 위로 하고 반듯이 눕다(supinate, supination)를 가리킨다.
새는 동이족의 한 갈래인 조이(鳥夷)와 관계가 깊다.
육국은 고요의 후손으로 언성(偃姓)이라고 전해 온다. 옛 성터가 지금의 중국 안휘성 육안현 북쪽에 있었다.《한서⋅고제기상》:"당양군 영포를 구강왕으로 삼고 육현에 도읍하게 하였다.(當陽君英布爲九江王, 都六。)"당 안사고《한서》주:"육은 여기서 현의 이름이다. 그러나 육은 본디 고대 제후국으로 고요의 후손이다.(六者, 縣名, 本古國, 皋陶之後。)"《사기⋅경포열전》:"경포는 육 사람으로 성은 영씨이다.(黥布者, 六人也, 姓英氏。)"당 사마정《사기》색은:"《지리지》에 의하면 여강에 육현이 있었다. 소임(蘇林)은 말하였다:‘지금의 육안현이다.’" 육국과 영국의 조상 고요는 은 왕조의 조상 설과 함께 동이족이다. 은대(상대)에 숫자 육을 중시하였고, 동이족이었던 언성(偃姓)의 육국도 숫자 육을 가장 존중하였다. 해서 육국은 모든 이름 앞에 숫자 육을 다 붙였다.
서강족(西羌族)은 숫자 삼을 중시하고, 삼을 여러 수의 으뜸으로 삼았다. 예컨대 강성(姜姓) 계통의 삼위(三危), 삼묘(三苗), 삼종(三鬷) 등이다. 화하족(華夏族)은 숫자 구를 중요시하고, 구를 여러 수의 으뜸으로 삼았다. 예컨대 구주(九州)⋅구유(九有), 구고(九皋), 구소(九霄), 구하(九河), 구구(九丘), 구택(九澤) 등이다.
육(六) 자를 갑골문은 ▢으로 썼는데 입(入) 자의 형체와 똑같다. 정산(丁山)《수명고의(數名古誼)》:"古借入爲六。……蓋六之與入殷以前無别也。(고대에는 入 자를 빌려 六 자로 썼다. ……아마 六 자와 入 자를 은대 이전에는 딱히 구별하지 않았을 것이다.)"《고고(考古)》1961년 제2기에 실린 글에 의하면 산동(山東) 주가교(朱家橋) 도관(陶罐)⋅안양(安陽) 은허(殷墟) 도궤(陶簋)의 숫자 괘상 속에서 六 자를 으로 썼고, 1982년 봄에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안양 공작대(工作隊)가 하남(河南) 안양 묘포(苗圃)의 북쪽 지역에서 은대의 무덤을 발굴 정리할 때 숫자 부호가 새겨져 있는 숫돌 한 개를 찾아냈는데 여기서도 숫자 괘상 속의 六 자를 으로 썼다.(鄭若葵《安陽苗圃北地新發現的殷代刻數石器及相關問題》,《文物》1986년 제2기)
입(入) 자와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두 빗금을 수직으로 길게 늘여서 ▢으로 썼는데 혹은 굽은 획으로 쓴 ▢ 모양도 있고, 혹은 둥그스름하게 쓴 ▢ 모양도 있다. 두 빗금을 세로획 밖으로 늘여서 ▢으로 썼는데 혹은 굽은 획으로 쓴 ▢ 모양도 있다. 위쪽에 또 짧은 세로획 한 개를 덧붙여서 ▢으로 썼는데 면(宀) 자와 비슷하게 변했다. 해서《갑골문자전(甲骨文字典)》에 말하였다:"▢象兩壁架有一極兩宇之棚舍正視形, 此爲田野中臨時寄居之處, 其結構簡易, 暴露於野, 卽古之所謂廬。《說文⋅广部》:‘廬, 寄也。秋冬去, 春夏居。’廬六古音近, 故▢得借爲數詞六。(▢은 두 벽 사이에 마룻대 한 개와 처마 두 개를 가설한 원두막의 정면을 보고 본뜬 것이다. 이것은 들에 지은 임시 거처로서 그 구조가 엉성하고 밖에 그대로 노출되는데 바로 고대의 이른바 원두막이다.《설문해자⋅엄부》:‘여는 들에 지은, 들어가 살 수 있는 오두막집이다. 가을과 겨울에는 비워 두고, 봄여름에만 거주한다.’廬 자와 六 자의 고대 한자음은 비슷했다. 해서 ▢을 수사 육으로 빌려다 썼다.)"금문은 갑골문을 계승하여 ▢(毛▢簋)⋅▢(免卣)⋅▢(曾姬無卹壺)으로 썼다. 전문은 위쪽 두 빗금을 안으로 구부려 ▢으로 썼다. 수호지 진묘 죽간(睡虎地秦墓竹簡)은 ▢ 모양인데 위쪽의 두 빗금을 살짝 구부려 썼다. 무위 의간(武威醫簡)은 ▢ 모양인데 위쪽의 두 빗금을 가로획 한 개로 썼다. 예서는 그 형체를 계승하여 ▢(孔宙碑)으로 썼다.《갑골문합집(甲骨文合集)》33273:"癸酉卜, 又尞(燎)于六云, 六豕, 卯羊六。"
《역(易)》의 괘효에 두 가지가 있는데 "ㄧ"은 양효이고 "--"은 음효로 양음⋅홀짝⋅정변(正變) 등 대립하는 양방을 대표한다. 구는 홀수(홑수)이고, 육은 짝수이다. 그 때문에《역》육십사괘 속에서"ㄧ"를 구로 부르고"--#34;를 육이라고 불렀다. 육칠팔구 네 개의 수 가운데 육⋅팔은 짝수로서 음이고, 칠⋅구는 홀수로서 양이다. 음수(짝수)도 두 개가 있고 양수(홀수)도 두 개가 있어서 다시 정과 변으로 나누었다. 팔이 정이고 육은 변이며, 칠이 정이고 구는 변이다. 그래서"陰變於六, 正於八"이라고 말하였다.《역》속에서 숫자 육⋅구를 사용하여 허신(許慎)은 육을"易之數"라고 했는데 당연히 본뜻이 아니다.
(1) 수를 헤아릴 때 다섯까지는 손가락을 구부렸다 여섯부터 편다. 즉, 닫혔던 손가락이 여섯부터 다시 열리기 시작한다. 그 때문에 숫자 육(여섯)을 우랄 알타이 어족의 일부 민족에서 상서로운 수로 여겼다. 우리나라의 수사 다섯이 닫히다는"닫"에서 오고, 여섯이 열리다는"열"로부터 왔다는 견해도 있다.